우연으로부터

 오후 2시는 되었을까. 눈이 오는 줄도 몰랐다. 창 밖을 보려고 한 건 아니고, 옥탑방인데도 습한 방 때문에 환기를하려고 창문을 열었다가 하얗게 변해버린 세상을 보니 나도 모르게 '우와-'하고 입이 열렸다. 아마 오늘의 처음이자 마지막 한 마디일 것이다. 나는 백수다. 졸업은 이미 작년에 했고, 취업을 하기위해 나는 창천동의 한 옥탑방에 살고있다. 공대를 나와서 졸업과 동시에 취업할 줄 알았는데, 공대가 취업 잘된다고? 그건 다 옛말이었다. 지난주에 발표가 난 체험형인턴도 모조리 떨어져서 무기력하게 방 한가운데 누워있다. 잠에서 깨도 할 게 없는 무기력한 하루가 시작되었다.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오후엔 도서관에가서 기사공부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스펙에 한 줄이라도 더 채워 넣어야지. 생각난김에 취업스터디도 하나 해야겠다. 영어는.. 나중에 하자. 오늘은 눈도오는데 밖에 나가는 것도 귀찮네. 그렇게 컴퓨터 전원버튼에 엄지발가락을 갖다댔다. “나와 대학생활을 같이하고 내가 군대 가있을 때도 날 기다려준 건 너뿐이구나 컴퓨터야.” ‘위잉-’ 나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컴퓨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켜진다. 그런데 웬걸 화면이 파란색으로 채워지더니 알 수 없는 글자들이 써진다. “아니 왜 또!” 홧김에 모니터 옆부분을 무언가를 베듯 손날로 탁 쳤다. 배경화면이 보인다. “꼭 혼나야 정신차리지!” 응? 그런데 화면이 뭔가 이상하다. 마치 다른 곳의 캠화면을 보는듯한 모습이었다. 어떤 통신상의 오류로 내 컴퓨터가 어딘가 설치된 캠이나 cctv에 연결됐다고 생각하고 재부팅을 하려던 순간, 화면을 바라보던 나는 컴퓨터를 끌 수 없었다. 화면에 비춘 모습은 우리가 살고있는 세상 어딘가 같았지만, 묘하게 위화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화면이 비추고 있는 곳은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교차로였지만, 모든 사람들이 순수한 형태의 사람계 사람들 뿐이었다.

 나는 컴퓨터에 있는 다른 아이콘들을 클릭해가며 캠화면을 보는 것 말고도 인터넷 서칭이나 게임같이 다른 것들도 할 수 있다는 걸 알아챘다. 처음엔 사람계 사람들만 모여사는 도시인 줄 알았다. 로드뷰로 어딜 가도 사람계밖에 없었으니까. 그런데 웹사이트, 뉴스, 유튜브, 실시간방송에도 사람계 사람뿐이었다. “2차~ 나랑%*#!!!” 순간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서 낮에 열었던 옥탑방의 작은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고라니계 여자애가 술이 잔뜩 취한채 비틀대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시간은 새벽 2시이다.

 쌓인 맥도날드 봉지. 치우지 않은 일회용 케찹들이 안그래도 어지러운 내 책상위를 더 어지럽게 하고있다. 컴퓨터가 이상해진지 3일째, 나는 모니터 너머의 세상을 탐구하느라 아직 한번도 컴퓨터를 끄지 않았다. 재부팅하면 이 이상한 모니터가 원래대로 정신을 차리게 될거란걸 직감적으로 알았다. 3일간 밤을 새가며 생각을 해봤는데, 내 컴퓨터는 지금 우리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와 연결되어 있는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 세계는 내가 살고있는 세계와 같은 시간축에서 흘러간다. 지난주 로또번호, 건물의 위치, 주소 모든게 동일했다. 다만 지금껏 알아낸 것 중 다른게 있다면 모니터 속 세계는 모든 사람이 사람계라는 점. 내가 컴퓨터로 실시간 뉴스를 보는데, 컴퓨터에선 사람계 사람이 진행을 하는데, 같은 뉴스를 휴대폰으로 보니 평소 내가 알던 원숭이계 앵커가 진행을 하고 있었다. 모니터 너머의 세계는 마치 진화가 사람계에서만 일어난 모습이었다. 또 차이가 있다면 그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행성을 지구라고 부르는 듯했다. 여기선 초원이라고 부른다.

 '지이잉-' 어떤 소리 조차 허용되지 않는 것만 같았던 내 방의 침묵이 휴대폰 진동으로 인해 깨졌다. 권쌤이었다. "옅, 크흠, 여보세요" 3일만에 말을해서 그런가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아직도 안일어났어?" 권쌤은 내 대학친구이다. 병아리계라 어리게만 보여서 몰랐는데 졸업이후에 교육대학원을 가더니 어느덧 임용발령 직전의 교사가 되었다. 병아리계도 이렇게 앞으로 나아가는데, 나만 정체되어있다는 걸 다시금 느끼게 해주는 친구였다. 권쌤은 마침 볼 일이 있어서 신촌에 왔는데 오랜만에 점심이나 먹자고 했고, 난 그제야 지금껏 먹어왔던 맥도날드 봉지들이 눈에 들어왔다. "좋지 점심. 난 좀 얼큰한걸 먹어야겠어." 권쌤이 떡볶이를 먹자고 하는걸 주변에 떡볶이집이 없어서 순두부찌개를 먹으러왔다. 술도 안마셨는데 해장되는 이 기분. 크으 권쌤이 사준다고하니 더 맛있었다. 안그래도 요새 아르바이트도 안해서 궁핍했는데, 이럴땐 권쌤이나마 얼른 자신의 직업을 찾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참 얘도 아직 월급 받기 전이지. 뭐 그래도 심적으로 나보다 여유롭겠지. 정말 밥만 빠르게 먹고나서 테이크아웃 전문점에서 1500원짜리 커피를 한잔 사들고 나의 작은 옥탑방으로 돌아왔다. "안돼-!!" 차가운 커피와 차가운 바깥바람 때문에 빨갛게 되었던 내 볼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모니터가 꺼졌다! 설마하는 마음으로 본체를 보니 본체도 꺼져있다. 제발.. 기도하며 부팅을 해보니 컴퓨터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자소서가 가득한 원래의 내가 봐오던 바탕화면이 3초만에 떠올랐다. "역시 SSD로 바꾸길 잘했어.."는 개뿔 이전처럼 모니터를 손날로 몇 번 쳐봤는데 애먼 손만 아플뿐이었다. 평행우주가 있다면 그곳이라고 생각했는데..
 일주일간 내가 봤던게 뭘까 고민해봤는데 도저히 답이나오지 않았다. 뼛속까지 이과생으로 자라온 내게 이런 판타지적인게 실재할리 없다고 뇌가 말했다. 어디 일본같은데서 몰래카메라 하는 프로그램을 내가 어쩌다 본거겠지. 현실적으로도 꿈 같은 상황에 생각을 오래 머무르게 할 수도 없었다. 나는 취준생이니까. 얼른 망상을 끝내고 다시 현실로 돌아와야지. 방구석에 하도 오래있다보니 헛 걸 봤나보다. 그럼 내가 3일동안 본 그건 다 뭐냐고!!!

 나는 시간이 많다. 백수이기 때문일거다. 물론 해야 할 것도 많다. 도서관에가서 기사 공부도 해야하고, 영어회화 공부도해서 점수도 만들어놔야한다. 기사자격증 하나 더 있다고 해서 내가 취업할 확률이 10%라도 올라가긴 하는걸까? 이런 잡생각이 들때마다 공부하려는 의지와 집중력은 떨어져만 간다. 후우.. 도서관에 사람이 제법 많아서 속으로만 한숨을 쉬었다. '띠링' 무선이어폰을 끼고있던 내 귓속으로 메신저가 왔다. 역시 날 챙겨주는건 권쌤뿐이구나. '혹시 주말에 미술관 갈래?' 살면서 미술관은 입구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래도 지쳐있던 내 일상에 콧바람이라도 쐬어줄 겸 권쌤을 따라가기로 했다. '좋아! 어디로 가면돼??'

 흰건 종이요. 검은건 그림이구나~ 권쌤에게 이끌려 간 그곳엔 조선시대에 그렸을 법한 그림이 잔뜩있었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 설렜던 내 마음이 이렇게 빨리 식을 수 있는지 나도 처음 알았다. 그냥 그림일 뿐인데 많은 사람들이 그림앞에서 떠나질 못하고 있었다. 덩치가 큰 하마계 아주머니는 고개를 기웃거리면서까지 한 그림을 응시했다. '신기하게 이런 미술관엔 다 초식계 사람들만 있단말야.. 이것도 유전적인 성향의 영향이라니깐..' 난 벌써 관람을 끝냈지만, 권쌤은 그 후로도 1시간이나 더 미술관에 머물렀다. 권쌤이 출구 지점까지 다 보고나서 또 다시 입구쪽으로 향할 때, 다음에 또 이런 기회가 생기면 어떻게 거절할지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권쌤의 도돌이표같은 재관람이 끝나고 미술관을 나와서는 권쌤이 옆에서 삐약삐약거리며 이것저것 설명해줬지만, 이미 미술관에서 모든 에너지를 빼앗겼기 때문일까? 귀에 들어오는 건 많지 않았다.

 그런데 그 뒤로도 막상 권쌤이 미술관에 가자고 할 때면, 일상이 너무 지루하고 결과가 보이지 않는 취준생활이 답답해서 따라 나가게 됐다. 그러다보니 나도 모르게 그림 앞에서 머무는 시간이 늘어났다. 물론 난 여전히 먼저 관람을 마치고 권쌤을 1시간정도 기다린다. 내가 평생 공부했던 분야외에 미술이라는 분야를 조금씩 알게 되는것도 나쁘지 않았다. 나중에 사회에 나가서 이런 주제로 대화를 하게 될 일이 생기지 않을까 생각하며 권쌤을 따라다녔던 것 같다.

 그 해 여름, 나는 삼성역 근처에 있는 작은 회사에 인턴으로 들어가게 됐다. 학부시절 배웠던 마이크로소프트웨어가 도움이 됐다. 같이 인턴생활을 할 동료들도 10명이나 있었다. 2달동안 우리는 급여를 받지 않는 조건으로 계약서에 서명을 했다. '열정페이' 말로만 들었지 직접 겪을 줄은 몰랐는데... 그래도 2달 뒤엔 정규직 채용의 기회도 생기고, 떨어진다 하더라도 이력서에 뭐라도 쓸 게 생기는 것 같아서 열정으로 극복하기로 마음먹었다. 먼저 회사에서 다루는 장비나 주로 하는 업무에 대해 교육을 받았고, 교육을 바탕으로 회사에 도움이 될 만한 특허를 써 내는게 2달간 해낼 우리의 목표였다. 우린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밤 11시 12시까지 회사에 남아가며 공부하고, 특허를 썼다. 그만큼 간절하기도 했고, 매일 세미정장을 입고 사무실에 나가서 사원증을 목에 걸고, 회사와 연계된 카페에서 커피를 사서 들고 다니며, 탕비실에 구비되어있는 과자같은 것들을 먹는 일종의 예비 직장인 생활이 재미도 있었다. 비슷한 또래의 인턴들과 밤까지 대학교에서 과제를 하듯 머리를 맞대는 것도 뭔가 가슴벅찬 일이었고, 가끔 회사 팀장님이 주는 법인카드를 받아 멘토인 선배들과 함께 이런 저런 조언을 받으며 회식을 하게되면 이미 직장인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아까 휴대폰 진동을 느꼈지만, 회사에서 교육중이어서 받지 못했었다. 교수님이었다. 응? 무슨일이시지? 학부시절 난 교수님을 도와 연구실에서 3, 4학년을 보냈었다. 졸업할 때가 되었을 때, 내가 취업을 빨리 하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더니 대학원을 종용하지도 않으셨던 분이셨다. "네, 교수님 전화하셨었나요?" 교수님은 뜻밖의 제안을 하셨다. 교수님이 하고있는 프로젝트가 있는데, 대학교 방학 기간동안 도와줄 수 있겠냐고 물어보셨고, 프로젝트에 기여하는 대신 관련회사에 추천서를 써 주시겠다고 했다. 졸업한지 꽤 되었는데도 아직 취업을 못했다고 하니 챙겨주시는 걸까? 이유가 어찌되었건 수 많은 학부생 중 하나였을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것에 감사했다. 은사님의 부탁이니만큼 거절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지금 하는 인턴과도 병행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그렇게 나는 낮엔 인턴으로, 퇴근후엔 대학교 연구실로 출근을 했다.

 교수님과 프로젝트를 하면서 당연하게도 인턴생활에 쏟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이전처럼 밤까지 남지 않았고, 오후 6시 퇴근시간이되면 나는 곧장 학교로 향했다. 매번 다른 인턴들에 비해 일찍 퇴근하다보니 눈에 띄었는지 멘토인 부장님이 나를 불렀다. 인턴 세 네명당 멘토가 하나씩 지정됐었는데, 우리 그룹의 멘토가 멘토중에 가장 직책이 높았다. "매일 일찍 가던데 무슨일이 있나?" 손에 들린 따뜻한 커피처럼 부드러운 말투였다. 사회생활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일까? 따뜻한 말투와 온화해보이는 표정 때문이었을까? 나는 여우계 부장님의 질문에 나의 고민을 있는 그대로 털어놨다. 마치 멘토가 나의 길에 진중하게 함께 고민해주고 해결해 줄 수도 있다는 기대감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대학 학부시절 연구실에 있던 얘기부터 퇴근 후 교수님의 프로젝트를 병행하고 있다는 얘기, 나아가서 열정페이로 있는 지금 이 회사에 정규직 전환보단 더 좋은회사에 가고 싶다는 이야기. 돌이켜보면 마지막 이야기는 정말 안하는게 좋았다. 이미 그 회사에 몸담은지 10년이 훌쩍 넘은 부장님이 듣기엔 불편한 이야기었던 것 같다. 부장님은 회사에서 신입사원을 뽑으면 2~3년 후에 다들 너처럼 더 좋은곳으로 이직해버린다는 이야기를 마치 울분을 토하듯 내뱉었다. 요즘 젊은 친구들 이야기도 나왔다. 끈기가 없다느니 노력이 부족하다느니 하는 이야기었다. 급여도 받지 않고 정규직 직원이 될지 안될지도 모르는 한낱 열정인턴으로 있는 내게는 와닿지 않는 소속감과 의무감이었다.

 학교에서 하는 프로젝트에 쏟는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껴서 주말에도 연구실에 나와서 프로젝트를 하곤 했는데, 그 날은 너무 화창했다. 방학이라 한산한 학교의 거리, 그리고 푸른 플라타너스 나무. 연구실에만 머물기 아까운 날이었다. 저녁에 막걸리를 사주겠다는 꼬드김으로 권쌤을 학교로 불렀다. 뜨거운 햇살도 조금은 부드럽고 기분좋게 바뀔 즈음 권쌤이 학교로왔다. 늦게까지 떠있는 해 때문에 이른감이 없진 않았지만 파전에 막걸리를 한 잔씩했다. 졸업한지 한 학기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권쌤은 학교가 그리웠다며 학교 정문을 지나쳐 플라나터스 길로 달려갔다. 학교 가운데를 크게 가르는 길인데 한 쪽으로 커다란 플라나터스 나무들이 줄지어 있어서 줄곧 동네주민들이 산책을 오는 공간이기도하다. 축제 때면 이 길을 따라 여러 동아리에서 행사부스를 짓는 곳이다. 대학시절을 떠오르게 하는 거리랄까? 짐을 챙길겸, 연구실에 들렀는데 공대 연구실을 본 적이 없던 권쌤이 아주 신기해했다. 이것 저것 물어보는데 권쌤에게 임베디드와 마이크로소프트웨어를 설명할 수 없으니 그냥 컴퓨터같은거라고 했다. 이번엔 권쌤이 날 미대 건물로 이끌었다. 공대 구경을 잘 했으니, 미대도 보여주고싶다고 했다. 미대 건물에 들어서자 복도 바닥부터 곳곳에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건지 물감 자국들이 남아있었다. 학생들이 그림을 그리는 공간이라며 보통 공대의 강의실 처럼 보이는 문을 열자 사방에 세워져있는 캔버스, 그 위를 뒤덮은 다채로운 색상들, 방학인데도 그림을 그리고 있는 학생들도 곳곳에 보였다. 이어폰을 끼고 그림을 그리는 학생, 물감을 뿌리고 있는 학생... "언니!!" 갑작스레 누군가 권쌤을 알아보고 달려들었다. 평소에 쉽게 마주해본 적 없는 과한 쾌활함이었다. "언니 졸업한거 아니였어요?! 뭐야뭐야 옆에는 남자친구~?!" 대답을 듣고 싶은건 맞는지 여러개의 질문을 내뱉었고, 권쌤은 그저 학교가 그리웠노라고 말했다. "아 오랜만에 다시 그림그리고싶다." 권쌤의 말이 끝나자마자 "언니! 여기 언니 사물함에 언니 캔버스 남아있던데?!" "와.. 이게 그대로있어??" 졸업한지 6개월이 지났지만, 권쌤의 흔적은 채 지워지지 않은듯했고, 그림을 그리고싶다는 권쌤의 말은 후배에게 인삿말로 하는 의미없는말이 아니라는걸 증명하듯 후배에게 아크릴물감을 좀 쓰게 해달라고 하더니 사과 하나를 뚝딱 그려보였다. "너도 그려볼래?" 그렇게 권쌤이 내게 건낸 붓은 3살짜리 아이가 처음 크레파스를 잡아보듯 생소하지만 설레는 일이었다. 까맣기만 한 23인치 모니터만을 봐오던 내게 그보다 두 배는 더 커다란 하얀 캔버스를 마주하자 내 손은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 큰 공간을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권쌤이 짜둔 물감, 덕지덕지 아무렇게나 칠해지는 캔버스, 다른 색으로 덮여서 캔버스 위에서 서로 뒤엉키는 색들, 형태가 있는 것도 아닌데 너무 아름다웠다. 그리고 너무 기분이 좋았다. 20여년.. 아니 거의 30년에 가깝게 살아오면서 처음 느껴보는 벅참이었다.

 월요일 아침, 옆사람과 럭비경기를 하듯 어깨싸움을 치열하게하며 지하철에서 내렸다. 나의 일상은 다시 열정의 무급 인턴생활로 돌아왔다. 두 달간의 인턴 생활도 어느덧 반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간 우리 인턴들은 각자 아이디어를 구체화했고, 나머지 한 달간은 아두이노나 라즈베리파이를 가지고 데모버전을 만들어야했다. 횡단보도에서 기다리는 사람의 행동을 따라하는 빨간불에 켜지는 사람모양 픽토그램, 수화를 영상으로 찍으면 번역해주는 기계, 흔들리는 배달 오토바이 보관함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피자판 같은 다채로운 아이디어들이 데모버전으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물론 나도 차량 도로상태를 인지하고 오버스티어링을 방지하는 자동차 모델을 만들어나갔다. 장난감 자동차에 카메라를 달고있는데 여우계 부장님이 인턴들이 모여있는 세미나실로 들어왔다. "자, 다들 잠깐 주목! 대표이사님이 여러분들의 아이디어를 발표로 듣고싶다고 하시네요. 3명의 아이디어를 선정해서 인턴 마지막 주에 대표이사님 앞에서 발표하기로 했습니다. 3명에 선정된 사람은..." 놀랍게도 발표자 3인 중 하나는 나였다. 정말 내 아이디어가 좋아서일까? 아니면 지난날 여우계 부장님께 털어놨던 이야기 때문에 내게 좀 더 회사의 의무감을 부여하고 싶었던 걸까? 뭐가 되었던 발표를 맡았으니 제대로 준비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고, 회사에 머물게 되는 시간은 더 늘어났다. 나의 여름방학은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고, 어느덧 인턴 마지막 주가 되었다. 대표이사에게 발표는 내가 첫 차례였고, 준비한 내용을 열정을 담아 이야기했다. 그런데 대표이사는 영 관심이 없는지 다리 하나는 꼬고 휴대폰으로 메신저를 하는지 시선은 계속 책상 위 휴대폰을 향해있었고, 종종 고개를 들어 내 발표화면를 볼 뿐이었다. 맥이 빠지는 발표였다. 아무리 대표와 인턴의 관계라지만, 그의 시간과 나의 시간의 값어치 차이가 이렇게나 많이 나는걸까? 나는 2주동안 밤을 새가며 준비한 발표인데, 대표에겐 듣는둥 마는둥 넘겨버려도 되는 20분이라니... 여우계 부장님이 이야기한 열정은 인턴에게만 한정된 단어였나? 뭔가 모를 분노와 답답한 감정이 올라왔다. 순간 내 감정을 그림으로 그려보고 싶었고, 이 느낌을 표출하고 싶었다. 집에 가는길에 A4용지 크기도 안되는 작은 캔버스와 12색의 물감을 샀다. 그리고 그 날 오후는 그림을 그렸다. 그리는 그 순간만큼은 아무생각없이 재미있었다. 다음날 회사 복도에 있던 손바닥만한 그림 하나를 내 그림으로 바꿔걸었다. 프론트에 있는 토끼계 안내데스크 직원의 도움을 받았다. 나무에 있는 잎을 따먹을 수 없지만 발버둥치는 목 짧은 기린으로. 나름 귀여웠던지라 주변 직원들도 좋아했다. 이 그림의 의미는 돈도 받지 못하고 열정으로 일한 인턴들을 기린에 빗대어 그린거라고 주변 인턴들에게 얘기했고, 동료인턴들은 사무실로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을 만큼 작은 소리로 웃으면서 맞장구를 쳐주었다. "크크크 맞다. 우리 방학 두 달 동안 돈도 안받고 일했지. 경험이라면서 돈도 안주는데 이게 맞는거가?! 크크크 이력서에 한 줄 더 쓰려고 이고생이지 크크킄" 하이에나계 형이 제일 동조해주었다. 발 없는 말이 빠르다했던가? 어느덧 이내 그림의 의미가 직원들 귀에도 들어갔고,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어떤 높은사람이 화를 냈다고 한다. 출근 할 때만 해도 걸려있던 그림이 퇴근 할 땐 없었다. 3일 뒤 인턴 마지막날, 사실 바라지도 않았지만, 정규직 전환이 되는 인턴 명단에 나는 없었다.

 8월의 끝자락, 보통의 대학생들이라면 2학기를 시작하느라 분주하겠지만, 취준생인 나는 다시 백여개의 자소설을 써내야하는 지루한 시기가 돌아왔다. 내 얘길 지어내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소설가들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여느때 처럼 습관처럼 컴퓨터를 켜는데, '지이잉-' 응? 이 기시감을 느껴본적 있다. '분명 3초만에 켜져야 하는데?' 화면이 버벅거렸고, 나는 작년 겨울의 사건이 떠올랐다. '손날치기!' 예전처럼 모니터를 내려치려는 그 순간, 화면이 켜졌고, 그 곳은 1년 전에 내가 마주했던 '지구'였다.

 가끔 상상했던적이 있다. 이 순간이 다시오면 어떻게할까. 1년 전 내가 봤던 모니터 너머의 세계를 다시 만나면 확인해보고 싶은 것들이 있었다. 먼저 지구의 '나'를 찾았다. 내가 초원에서 이 지구라는 평행세계를 인지하고 있다면, 지구에서의 '나'도 나를 인지하고 있지는 않을까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지구의 '나'와 소통할 방법이 없었다. 나에게 메신저를 쓰려고 해도, 나에게 쓰기와 같은 건데.. 그래도 혹시 몰라서 나에게 쓰기로 몇 가지 메일을 보내봤지만, 답은 없었다. 그 외에도 내 컴퓨터 바탕화면에 메모장에 글을 남겨보기도 하고, 게임할 때 자주 켜두는 디스코드에서 채팅을 쳐봐도 아무런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아무런 대답이 없는게 사실 당연한 결과였겠으나, 나는 영화에서 본 것 처럼 다른 세상인 지구에 있는 '내'가 응답한다면 영화에서 봤던 것 처럼, 내 컴퓨터 모니터에 글이 써질 것을 예상했던지라 기운이 좀 빠졌다. 그럼 다른 사람은? 초원의 내가 다른차원의 누군가와 통할 수 있는지 확인해보기로 했다. 지구의 권쌤에게 PC로 메신저를 보냈다. '중학교는 여름방학 끝났지? 요새 출근하고 있겠네?!' 자연스러운 대화로 권쌤과 내일 저녁 약속을 잡았다. 지구에서의 권쌤과 여기 초원에서의 권쌤이 동일한지 확인해보고싶었다.

 권쌤의 공식적인 첫 학교, 첫 제자들은 어떤지, 학교생활은 재밌는지 들어보고 싶다고 했다. 권쌤은 2학기엔 학년계를 맡게됐다며, 그 얘길 해주겠다고 했다. 물론 약속은 모니터 너머에 있는 지구의 권쌤과 했다. 그리고 난 내가 살고있는 이 곳, 초원의 권쌤에게는 따로 연락한 적이 없다. 과연 어제 내가 얘기한 권쌤과 오늘 만날 권쌤은 같은 시간을 공유하는걸까? 설레는 마음으로 약속시간에 맞춰 떡볶이 가게로 갔다. '딸랑딸랑-' 가게 문을 여는 순간, 문에 걸려있는 종이 울렸다. 그 소리가 나의 헛된 기대를 깨버리기라도 하듯, 거기에 권쌤은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30분을 더 기다려봤지만, 권쌤은 떡볶이 가게에 나타나지 않았다. '음.. 그럼 초원과 지구는 서로 독립되어 있다는 건가..?' 그런데 분명 내가 처음으로 컴퓨터 모니터로 본 지구는 초원과 동일한 시간에서 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다만, 사람들의 종족계만 다른체로 말이다. 나는 곧장 권쌤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디야?" 다짜고짜 묻는 나의 질문에 어이없고 황당하다는 듯 "집이지."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권쌤은 애초에 나와 약속도 잡은적이 없었다. 다만, 학교에 첫 출근을 한 것은 맞았다.

 '앗!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한다!' 제발 캄퓨터가 꺼지지 않았길 바랐다. 난 꼭 확인해야할 게 있다고! 벌컥 방문을 열자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컴퓨터는 항상 있는 그 자리에서 모니터의 약한 빛을 내뿜고 있을 뿐이었다. 화면보호기가 켜지면 컴퓨터가 꺼질까봐 프로그램을 돌려두고 가길 잘했었다. 나는 곧장 메신저를 켰다. 혹시나 지구에서의 내가 떡볶이 가게에 가지 않았을까? 아니면 권쌤이 독립된 존재이듯, 그 곳의 나도 약속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는걸까? 지구의 권쌤에게 곧장 메시지를 보냈다. '어디야?' 그러자 권쌤에게서 엄청난 속도로 메시지가 왔다. "어디긴 집이지" 응? 지구의 권쌤도 집이라면 내가 어제 약속한 건 뭐지? 내게 든 의문은 바로 다음 대화에서 풀렸다. '나랑 어제 약속했잖아. 떡볶이먹기로'라고 내가 말을 꺼내자마자 권쌤은 화가 난다는 듯 '그런데 아까는 니가 그런 약속 안했다며! 어이없네'라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아, 뭔가 꼬였다. 지구의 권쌤이 지구의 나와 연락을 했구나! 그리고 지구의 나는 약속 사실을 모르는거야! 방금 초원에서의 권쌤처럼! 지구의 나와 실재 나는 독립되어 있다!' 엄청난 사실을 알아낸 나는 방금 내가 알아챈 것을 권쌤에게 설명하려고 했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영화에서 보면 내 작은 행동이 다른 어떤 세계에서 나비효과처럼 큰 파장을 일으키는 판타지적인 상상이 내 머릿속을 순간 행성의 멸망까지 보게했기 때문이었다. 이 괴이한 상황을 설명하기보다 파악하는게 먼저라고 생각한 나는 대화를 이어갔다. "아 미안미안, 요새 잠을 못자서 그런가 약속같은걸 자꾸 까먹더라고. 출발하기 전에 나한테 메신저 하나만 해주지.. 그럼 까먹지 않았을텐데.." 그리고 권쌤의 답변은 나를 더 혼란에 빠트렸다. "아니 나도 아까 희안했다니까? 떡볶이 가게에서 너한테 메신저를 보냈는데, 메신저 오류인지 너한테만 메신저가 안가는거야. 그래서 전화한거구. 근데 전화했을땐 완전히 모른체하더니, 이제야 기억나는 척하는거야?" 이후로도 권쌤과 이야기를 더 해보았다. 올해 초, 지구와 연결되었던 그 날 부터 오늘까지 일어난 사건들에 대해 물어봤다. 역시나 완벽히 일치했다. 지난주 로또번호까지도! 다만 이 평행세계에서 나와 권쌤이 독립된 존재가 되어버려서 서로의 시간축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대화하다보니 유일하게 다른 것을 발견했다. 올여름에 분명 대학교에가서 권쌤 때문에 처음으로 캔버스에 그림을 그려본 그 일이 지구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다. 권쌤은 그 날 내가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고 한다. 물감이 옷에 묻을 수도 있다며 한사코 거부했다는 것이다.

 10월이 지나고, 90개 정도의 자소서는 12개의 기업을 뚫었고, 면접일정이 잡혔다. 4개 기업의 일정이 겹쳐서 그 중에 우선순위가 낮은 2개는 포기했다. 면접을 보려고 새벽 5시에 일어나 KTX를 타고 창원을 갔다오기도 했다. 면접을 보고나서 다시 서울로 올라오는 기차에서 손에 들린 면접비 3만원을 보고있자니 뭔지 모를 감정이 창 밖 노을과 섞여 몰려왔다. 이 지긋지긋한 취준 활동 말고도 다른 무언가를 하고 싶었다. 왜 요새 유튜버니 인플루언서니 하며 개인채널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돈도 많이 번다고 들었다. 혹시나 그렇게 돈도 벌게되면 좋을 것 같아서 미술 관련된 팟캐스트를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모르면 잘 아는 사람을 모으면 된다고, 곧장 권쌤부터 섭외 리스트로 떠올랐다. 그런데 무슨 생각이었을까 지구의 권쌤에게 연락을 했다. 지난 몇 달 간, 나는 평행세계와 그 평행세계와 초원을 연결하고 있는 내 컴퓨터에 대해 알아봤고, 이제는 특정 부팅방법을 통해 지구와 연결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냈다. 그 방법은 어이없게도 발가락으로 본체의 전원버튼을 누르면 되는 것이었다. 그것도 무심한듯 시크하게 눌러야 연결되고, 간절히 바라면 연결되지 않았다. 이게 무슨 비과학적인 방법이겠냐만은 정말 그랬다. 뼛 속까지 이과생인 나도 처음엔 받아들이기 힘들었으나 슈뢰딩거의 고양이도 죽어있고 살아있는 중첩상태이지 않은가?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지난 몇 달 간에 걸쳐서 지구에 존재하는 사람계 권쌤에게 평행세계 초원과 내가 겪은 이야기를 해주었고, ISTJ인 권쌤은 처음엔 이해도 못하고,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평행세계 자체를 믿질 않았다. 하지만 하나 둘씩 믿을 수 밖에 없는 증거들을 보여주며 차근차근 눈높이 설명을 통해 지금은 어느정도 이해하는 듯 하다. 이후에 이 평행세계를 더 이해하기 위해 초원의 나와 지구의 권쌤이 협력했다. 내가 초원에서 지하철 물품보관함에 물건을 넣고 지구의 권쌤에게 찾으러 가라고 해보거나 내가 편의점에서 하나밖에 안남아있던 크림빵을 사고나서 권쌤에게 같은 편의점에가서 크림빵을 사보라고 한다거나 하면서 두 세계사이에서의 나비효과나 동시성에 대한 실험을 해보았는데, 생각보다 나비효과라고 할 만큼 큰 변화는 없었고, 마치 잠시 어긋났던 차선을 되돌아오는 자동차처럼 굵직한 사건들은 변함없이 양쪽 세계에서 일어났다. 그렇다고 어디 불을지르거나 교통사고를 낼 수는 없으니 굵직하다고 할만한 변화는 줄 수 없었다. 내가 노벨상을 받을 수도 없고, 그렇게 양쪽 세계는 같은 사건들이 동시에 일어나며 같은 날이 지나가고 있었다.

 지구의 권쌤에게 미술관련 팟캐스트를 하자는 제안을 했을 때, 권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같이 하자고 했다. 다만, 수익창출이 목적이 아닌 자기수양적 측면에서 받아들인듯 했다. 어쨌든 권쌤덕분에 같이 할 사람들도 어렵지 않게 구했다. 같이 미술공부를 하는 사브레님을 섭외했고, 나는 대학시절 알고지내던 미대생인 왕자님을 섭외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 직접 마주하지 못한 채, 컴퓨터와 화상대화프로그램을 통해 미술식탁이라는 팟캐스트를 시작하게 되었다.